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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창고/2019

수도꼭지

 너는 투명한 주제에 감히 색을 가지려 하는 물 따위를 사랑했다. 훑으면 스며들어 사라질 무색무취의 물 한 방울에 집착했다. 물을 사랑하는 너는 사실 색이 예쁜 이온음료도, 노을을 삼킨 바다도 좋다고 말했다.

 그게 뭐야, 그럼 물이 아니라 액체를 좋아하는 거잖아.

 아니야. 물이 좋은 거야, 물이좋은 건데.


 입술을 비죽 내민 너는 몸을 돌려 내게 등을 보인다. 그러다 목에 걸어둔 카메라를 만지작댄다. 너의 가슴과 허벅지에 닿은 카메라와 휴대폰엔 손전등의 빛을 무대 삼아 반짝이는 이온음료나 뭐가 바단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워져 버려 도심의 불에 옅게 빛을 발하는 짠 액체가 가득했다. 아직 덜 빠진 젖살과 볼록한 볼보다 더 뽈록 튀어나온 입술이 보인다.

 넌 언제나 과하게 사랑스럽구나.

 물에서 태어났으니까.

*** 

 실제로 너는 건강한 어머니를 가져 물 위에서 태어났다. 건강한 너와 건강한 너의 어머니는 서로를 쏙 빼닮아 물을 사랑하셨지. 하지만 건강했던 그는 바싹 말라 타 죽었다. 물속이었다면 살 수 있었을지도 몰랐는데. 그러니 너에게 물은 생명줄이나 마찬가지였다. 물속에서라면 넌 아직 탯줄도 자르지 않은 아기 같은 아이가 됐다. 벌거벗은 네가 욕조 안으로 들어간다.

 수도꼭지가 안 닿아, 물 좀 틀어줄래?

 

 가끔 거센 폭포처럼 파고들 틈이 없는 사람이 되곤 했던 너는 언제나 나에게만은 부드럽고 느린 속도로 흘러가는 강이었다. 난 그런 너의 안을 파고들어 차가운 물을 따스하게 데운다. 허리를 숙여 너의 쭉 뻗은 다리 사이에 손을 짚고 수도꼭지를 튼다. 따듯한 물이 파란을 머금고 흘러내린다. 다리 사이에서 섬세히 몸을 지탱하던 얇은 나의 손끝엔 네가 보는 파란이 배어있었다. 해맑게 웃는 너의 입이 파란 물에 잠긴다.

 이건 파랗지만이온음료 같은 게 아니야.

 응.

 그리고 바다도 아니고.

 응.

 사랑해.

 응.

 

 다음 수도꼭지엔 분홍을 넣어 온통 붉게 만들어야지. 제 좋은 일이 아니면 사랑한다 말하지 않는 입술을 더욱 붉게 물들여야지. 나는 파래진 너의 입술에 입 맞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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